감성의 계절에
늙은 남자와
어린여자가
나란히 걸어간다
그렇게 가다보면
늙은 남자는
제 사랑하는 여자에
발 을 맞추느라
조금씩 늙어가며
어린 여자는
제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가려고
문득 문득
늙은 여자가 되어간다.
이 시는 수학을 하신다는 어떤 분이 서글픔이라는 감성의 논리로 풀어낸 시이다. 저런 시를 낳은 그의 마음의 수학 공식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그의 마음에 서글픔이라는 공식이 먼저 작정하고 떠올라 있었는지, 눈에 띈 어떤 광경이 마음 속의 그 정서를 불러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광경을 목격할 때는 동시에 어떤 감성, 마음의 공식을 가지고 그것을 본다는 사실이다.
시가 아니라도, 미운 며느리는 발꿈치도 밉고 예쁜 딸은 눈꼽도 예쁘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을, 서글픔이라는 공식을 걸면 모든 것이 서글퍼지는 것이다.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가 걸어가도 서글프고 둘이 다 늙었어도 서글프다. 둘다 젊었어도, 저들이 또 늙어갈 것이 서글플 것이다. 감성이란 대개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렇다고 하면 그 자체로서 절대인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행복하기로 작정한다. 엷게 비껴드는 가을햇살 때문에도 알맞게 끓여진 커피 때문에도 행복하지만, 아침부터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오토바이 소리도, 뒤따르며 붕붕거리는 마을버스의 소리도, 힘찬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즐거운 소리로 들린다. 나는 오늘 하루종일 내 기분을 이런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희망과 절망, 미움과 그리움, 그 많은 정서들이 우리 안에서 수많은 꽃을 피웠다가 지우고 수많은 집을 지었다가 허문다. 아침에 나팔꽃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마음 느긋한 소가 될지언정, 또는 꽃과 소를 동시에 가질지언정, 그 때마다 하나의 완성된 아름다운 감성, 마음의 공식을 가지고 싶어 한다. 시를 쓰는 마음도 그렇다.
자신에 대한 하나의 완성된 공식이자 일관된 관점인 자아개념 역시, 참 '말릴 수 없는' 감성적 요소를 그 핵심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누구보다도 감성적인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을 매우 이성적인 사람으로 그리는가 하면, 매우 이기적인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을 이타적인 사람으로 파악하는 데야 그걸 누가 말리겠는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나는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의심하기도 한다. 나 자신도 남이 보면 그렇게 엉뚱해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참 끔찍하다.
자신을 모르고 있으면서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현실이자 논리이다.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나를 잘 알아', 라는 말은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안다고 믿는다는 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성은 그 안에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감성의 논리, 그것은 그 안에 결이 있고 망이 있고 역동이 있는 하나의 전체이다.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은 이 감성의 근거는 다 그 마음 안에 있다. 마음 바깥에 있는 근거는 있다고 해도,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는 그 사람만의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아무런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마음에 관한 한, 안다는 말이나, 모른다는 말이나, 다 사실상 무의미한, 하나마나한 순환론리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아는 정도의 차이이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중에서 어디에 촛점을 두고 주목하는가의 차이이다. 그래서 마음에 관한 한, '알다가도 모른다'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등은 물론이고 가치중립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과학에서도, 인간활동은 개인적인 가치와 감성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람마다의 각기 다른 경험과 정서가 보태어지면서, 인간활동은 더욱 다양한 논리로 전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이 감성의 밑그림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도, 감성과 이성은 뗄래야 떨 수 없는 동반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체로 감성형보다는 이성형으로 분류되곤 해 왔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성적인가? 요즘 들어서 생각해 보면, 나는 갈수록 나 자신이 어떤 형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은 앞의 논리대로, 내가 나의 감성적인 면에도 주목하게 되었다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존재이고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이다. 감성에 관한 한, 가을에 단풍이 들듯이 마음이 물드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독야청청, 곧고 푸르기는 하나 뽀족하고 외곬수의 감성이 온유하고 풍성한 감성인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보기에 아름답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변화의 힘은 점점 더 떨어져 마음이 굳어지고 닫혀져 갈수록 더 예민해지는 피해의식과 소외감에 빠져들기 십상이지 않은가.
독야청청과는 반대로, 오래 짓눌리고 갇혔던 감성이 이윽고 거친 분노가 폭발하는 열혈적인 감성으로 전환되는 모습은 보기에 참 안타깝다. 그러나, 한동안의 폭발이 계속되더라도 그것을 옆에서 말없이 바라 보아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종내 그 폭발을 멈추고 고요한 내면의 변화로 관심을 돌리고 주목하는 시간을 맞을 수 있으리라. 그런 사람이 옆에 없더라도, 스스로 그런 내면적인 감성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마는.
그리하여, 미움도 원망도 가시고 이기심은 더욱 아니게, 맑은 감성으로 되돌아가 오롯이 다시 피어나는 꽃. 나는 그런 길로 가고 있는 친구들을 본다. 그 친구들은, 이도 저도 아니게 어정쩡한 인생관과 무디어진 감수성을 비움이니, 너그러움이니 하면서 쳐지고 눅진해져만 가는 나와는 비교가 되는 신선한 아름다움으로 와닿는다. 가을이 되니 그런가, 나도 한 잎 단풍처럼 아름다운 감성의 빛깔로 물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진: - 순례자 / 칼럼 황혼의 연가
인용된 시 :[ 맘만하가 ] / 까페 아름다운 오류
(빈지게님이 올리셨던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