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나무계단

해선녀 2004. 4. 8. 08:39

 

 

우리가 다닌 그 오래 된 중학교엔 나무계단이 있었지. 너도 생각나지? . 그건 삐걱거리곤 했어. 나는 일부러 발을 짚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가 그것이 궁금해서 귀를 기울이곤 했지. 소리가 나지 않는 칸은 재미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그냥 곱게 발을 내려 놓기엔 너무 심심했는지,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삶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열쇠가 그 안에 있기라도 하듯...발자국 하나하나마다에 나는 귀를 기울였어. 삐걱, 빼걱, 삑 , 빽, 삐익, 빼그닥...아, 얼마나 재미있었던지...하하.

아마, 내가 고 3 마지막 때였을 거야. 나는  그저, 밋밋한, 정해진 길을 똑바로 착하게 걸어 올라가는 모범생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졌다. 지긋이, '아직도' 모범생인 다른 아이들이 가는 길을 소리나게 건드려 주고 싶었지. . 삐딱해지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일부러 사복을 입고 극장에도 가 보고 좀 색다른 특별활동을 한답시고 자전거 반에도 들고... 그 때 쯤이었어. 내가, 실어증에 걸렷다고생각한 것도...무엇이든

 

무엇이든 이유를 모르는 게 잇으면 어디까지고 파고 들기를 좋아햐던 내가, 시험 때가 되면 아무 것도 더 알아 보기가  싫고 강요된 대답들을 보따리 보따리, 줏어섬기며 그래, 무엇이든 덮어놓고 외우는 거야. 더 이상 이유를 묻지 말어... 외워 줄께.  그렇게  묵언의 시니컬리스트가 되어버린 거라...그건 사실, 고역이엇고, 나답지 않은 것 고사하고 도무지 잘 되지가 않앗어. 이유를 모르고 외우기만 하는 건...

 

그런 실어증은 그 보다 훨씬 전부터 이미 우리에게 강요되고 있었지. 중 1학년 때 였어.연희라는 아주 조숙한 아이가 바로 내 뒤의 옆자리에 앉아서 늘 나를 비스듬히 뚫어지듯 바라 보면서 시험지가 코 앞에 올 때까지도 한 자라도 더 보려고 책을 움켜지고 있는 나를 비웃는 둣 한 마디씩 던지곤 했지. 야, 공부벌레, 고만 좀 봐, 제발! 그 때,  나는 그 소리에 얼마나 속상하고 약이 올랐던지 몰라. 나는 그 애가 은근히 두려우면서도 좋아했거든. 내가 소공녀나 읽던 그 시절에, 그 아이는 벌써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훑고 있었어. 며칠 전부터, 시험 공부라는 악몽에  시달리기만 할 뿐, 막상, 시험범위를 제대로 한 번도 훑어 본 적이 없었던 차에, 마지막 몇 분을 남겨 두고서야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마구 마구  앞뒤도 없이 머릿속에 집어 넣고 있는 모습이 나 스스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햇던지...그랫던 아이가 대학졸업 후 얼마 안되어 폐병으로 죽었다는군.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곤 하던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시험 때마다 가장 큰 '적'은 사회과목이었어. 역사, 공민, 지리, 경제, 가정, 심지어 도덕가지도, 그 땐, 모든 것을 이유불문, '달달' 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로 우리들에게 제시되었잖아. 그게 왜 그런 거지? 이런 질문은 거의 '금지된 불가항력의 짐이었고 지옥이엇지. 오죽하면, 나이가 한참 들어서까지도 '시험' 보는 꿈을 꾸었을까...원래 유별나게 질문이 많은 아이였던, 수업시간은 그야말로 '탐구'의 시간이었던 내가  대학입시를 앞둔 고3무렵엔 더 이상 질문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 하기 시작하면서 내 실어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거야. 특히, 사회과목을 점점, '그냥,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 무조건 외우기에도 시간이 촉박해지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듯이 줄줄 외우기 선수가 되어 가는 아이들을  그 연희처럼 물끄럼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무엇이든 다 일리가 있고, 무엇이든 다 문제가 있어 보엿는데도 아무 말도 안하고 넘어 가고 또 넘어 가는 실어증...

그래도, 유일하게, 나에게 탈출구가 잇었던 것이 바로 너였지. 그건 내게 큰 행운이었지. ..우리 둘은 다 너무 '탐구적'이었어. 중학교때부터 둘이 꼭 붙어다니며 무엇에 관해서든, 갑론을박, 다른 아이들이 들으면 둘이 싸우는가,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르 사뭇 심각한 논쟁을 하기를 좋아했어.. 우린 대학이 달라졌어도 두 대학을 한 캠퍼스처럼 오가며 그러기를 계속했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이...그러나, 결혼 후,  내가 미국으로 떠나고, 너도 떠났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 후, 우리는 너무나 달라져버렸어. 미국에서 영영 눌러앉아 살게 된 네가 한국엘 오가며, 또는 내가 네한테 가든지, 전화 통화를 하며, 우리는 너무나 다른 '코드'로 삶을 살고 있다는 걸알게 되었어. 

 

우리는 이제 서로 너무 다른 계단을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며 밟고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  그건 순전히, 서로 처해졌던 환경 탓이었을까? 아니면, 만난 대상 탓이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어. 네가 밟아 간 계단들과 내가 밟아 간 계단들 하나 하나가 각기 무슨 중요한 소리를 냈던가, 그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었을까...지금 삼십 년, 우린 서로 너무 멀리 와 버렸어.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는대,그러다가, 나는 서로 삼십년 동안의 그 계단들을 다 다시, 하나 하나 들여다 보면서 소리를 내어 보고 싶었어. 그것이 어떻게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는가를 확인하고 싶었어.

지난 여름에야, 우린 며칠 동안을 우리집에서 단 둘이서만 지내며 서로 궁금했던 아귀를 맞춰 볼 기회가 생겼지. 하나에서 열까지, 영판 다른 너와 나의 삶의 양상에서 정말로 어떻게 서로 다른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는지를 맞추어 보았지. 아귀가 맞지 않으면 우리 둘 사이에 또 다른 계단이 서더군. 그 그 계단에서도 또 소리가 나더군. 그 소리도 정말, 재미있었어. 우린 여전히 탐구심 많은 고교시절로 돌아가서 너와 나의 삶을 되돌아 보고 온갖 잡다한 것들도 가져와서 새로운 칸으로 끼워 넣어 갔지. 거기엔 진짜 사회과목이 있었어. 서로 다른 사회에 사는 너와 나의 이야기를 꺼내 놓고 둘 사이의 최대공배수와 최대 공약수와 공집합과 여집합을 확인해 나갔지.  그건 바로, 우리들 삶의 논리였어. 각자 다르지만, 서로 가까이 비추어 보면 결국  그 탐구를 좋아하던  마음속 빛이 여전히 통하는...

 

그 시절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밤새도록 내 방에서 이야기하던 그 때와 똑 같이...우린 삐그덕, 빼그덕 소리를 내며 몇 날 며칠을 떠들었지. 못말리는 괴짜들이 되어. 실어증은 싹 사라져버렸어. 그립다. 지금 다시. 그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그 나무계단을 다시 쌓아 걸어 올라가고 싶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집을 두어 번씩 되돌아 바래다 주며 노래를 부르거나 영어로 지껄이는 연습을 하거나, 논쟁을 하던 그 때처럼, ,시험범위까지는 들어 가지도 못해도, 밤새도록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함께 '탐구'하며 오르내리던  그 때처럼...이제는 더 이상 같은 계단을 함께 오르지는 않지만, 서로의 사이에 서 있는 또 다른 계단을  그 때의 그 다리처럼 투명하게 건너다 보며 고개 끄덕이며 가고 싶다....  우리들에게 그런 날이 언제 또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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