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와의 동행
비가 퍼붓는데, 뒷산 숲에서 어린 새 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면 언제나, 새들은 어디서 비를 피할까, 그게 걱정이었는데, 어린 까마귀가 까악 까악, 아까부터 혼자서 자꾸 운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것일까? 새야, 우지 마라. 나도 그렇게 뾱뾱거리며 태어났지. 점점 재재거리고 악악거리다가 이젠 웅웅거리는 내 안의 소리만 남았단다. 새야, 지금은, 소리가 작아졌네. 어디 바위 밑에 꼭꼭 숨어 앉아 있니? 그래도, 겨울이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비그치면, 너는 또 동네로 내려와 골목 아이들의 화답하는 목소리도 들어야지. 네 소리는 꼭 아이들이 야, 야, 이리와, 이리 좀 와서이것 좀 봐, 외치는 소리같다. 아, 어서 비가 그쳤으면.
2. 어정쩡하게 아픈 날들
연일, 선선하고 청명한 날씨다. 가을은 가을인 모양이다. 그 까마귀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며칠 내내 소리를 못들었다. 내가 이렇게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지. 며칠, 뒷목이 뻐근하고 미열이더니, 이젠 허리다. 그 핑계로, 레슨도 미루고 오늘은 양평행을 또 미루었다. 사실은 불규칙한 생활에, 운동한답시고 과로한 탓인 것을.
3. 늩공부 막바지
어제, 금요일, 벼르던 끝에, 며칠 전부터 로체스터에 가 있는 태오애비에게 전화했다. 시험이 언제니? 화, 수요일요. 대답을 듣는 순간부터 얘가 지금 너무 힘들구나, 직감했다. 아, 정말, 힘들어 죽겠어요. 공부가 너무 안돼요. 스트레스로 꽉 찬 목소리. 버밀리언을 떠나기 전, 웬일로 내게 전화하던 목소리도 그랬었다. 너 지금 너무 힘들구나. 이제부턴 책 보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라. 넌 언제나 그랬잖니? 그냥, 봤어요. 그렇게 그냥, 시험 닥치면 네 아는 것 만큼 보고 지나갔잖아? 모든 것은 지나가는 거야. 패스해야 지나가지요. 이번에 패스 못하면, 내년에 또 봐야 하는 걸요. 그럼, 또 보는 거지, 뭘...암튼, 어서 집에 가서 푹 자고 시험은 아는 만큼만 써. 네게 지금 필요한 건 마음을 편안히 가지는 것, 잠자는 거야. 알았어요.
그리고는 오늘 토요일, 잘 잤는지, 온통 애비 생각이면서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내 말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저러다 또 쓰러지기나 하는 것 아닐지? 나도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 바라 보면서, 순간마다 노심초사, 불길한 생각도 수없이 해왔지만, 누구처럼 3천배를 하기는 커녕, 애틋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해 보지도 못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야 없겠지만, 제 운명은 제 자신밖에 만들어 갈 수가 없다는 것만은 알 것이다. 나이 40에 새삼스럽게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 내가 무엇을 더 조언하고 가르치겠는가? 애틋해 하는 것도 부담만 줄 뿐이다...
4. 가르친다는 것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행위를 보여 주면서, 그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보여 주면 그걸로 다인 것이 우리의 행위이다. 그 행위를 무엇으로 읽는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담 풍하면서, 너는 바람 풍해라, 이런다고, 그 아들이 바람 풍할까? 그 아버지는 내내 바담 풍을 하고 있으니, 바람 풍으로 들릴 수가 없거나, 바람 풍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아들이 바람 풍을 할 지, 바람 풍할 지는 순전히 그 아들의 몫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앞에서 아무리 열심히 떠들어도, 그는 우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우리가 우리를 가르치며 비춰 볼 또 다른 영혼의 거울일 뿐이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절에서나 저자거리에서나, 이것은 다 마찬가지, 우리는 언제나 우리 스스로를 가르치고 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간에.
5. 運半氣半
운인지, 기운인지, 사실, 그걸 분석해낼 도리가 없을 때, 우리는 그렇게, 半半이라고 한다. 그걸 판단하고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다 '제 눈의 안경'이다. 허상일 수도 있는 잣대로 , 역시, 허상일 수도 있는 한 존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 꿈에서 깨어난 내가 진짜 나인지, 기껏, 깼다는 내가 그 나비가 꾼 꿈에 불과한지, 우리가 다 저 장자의 나비가 아니던가? 줄무늬노랑나비, 배추흰나비, 산호랑나비...하지만, 더없이 천진하고 아름다웠던 그 날갯짓도 가을이면 다 접고 떠나야 할.저 버지니아 울프의 나방들이기도 하다. 運이든, 氣든, 그것이 다하여 스러져 갈 때가 오면 우리는 잠자코 순응하며 떠나야 한다. 허튼 짓으로 피날레나 장식하지 말고.
6. 행복감과 불행감
그러니, 오직, 살아있는 동안, 얼마 안되는 재능으로, 얼마 안되는 재산으로, 제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게 행복이다. 행복감이 강남 사람들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봉천동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유. 그런데, 그런 비교 또한, 안 할수록 좋은 것. 그런 행복감은 불행감을 그 안에 깔고 있으므로, 언젠가 그 불행감이 불쑥, 밀고 나올 수도 있는 것. 그 또한 저 장자의 나비처럼...
새들도, 나무들도 비교할까? 안 한다. 그들은 절대로 자살을 안 하는 걸 보면. 아, '자살한 새'의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던가? 그 새는 새의 영혼이 아니라, 어쩌다가 비교하는 나약한 인간의 영혼 한 가닥을 받아서 나왔던 게지. 비교하지 않는 절대적 행복감, 깨지 않는 꿈. 산다는 것은 깨고 깨고 또 깨다가, 태생의 그것을 되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되찾아서, 불행 따위는 행복이라는 그 밥의 반찬쯤으로나 옆에 두고 즐길 줄도 알게 되는 것.
7. 영정사진, 아니, 영정그림
친구가 그려다 준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식탁위에 팔꿈치를올리고 잔뜩 어깨를 웅크린 채, 무엇인가를 열심히 비 난하고 있던 참의 내 커다랗고 부스스한 얼굴. 작품성은 어떨란가, 영정사진으로는 못쓰겠네. 주름살이야, 내가 더 오래 살면, 저보다도 더 많아질 터이지만, 저 표정이 저게 뭔가?
갈수록 내 표정이 더 저리 되어 갈까, 그게 두렵다. 책상 위에 세워 두고, 거울삼아 들여다 보리라 하면서도, 오늘도 친구가 와서 오늘은 웃는 얼굴을 찍어야겠어, 불쑥 사진을 찍는데, 됐어, 이제 그만 해, 손사레부터 친다. 그래, 어떤 그림이든 네 모델이 되어 주마고 했던 건 언제고? 아직도, 작품성과 리얼리즘과 목적성 사이에서 어정쩡, 꿈과 현실 사이에서 왔다리 갔다리, 나비의 혼몽이다. 하긴, 영안실에 찾아와 준 손님들을 못마땅하다 못해 측은하다는 듯 내려다 보고 있는 얼굴.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내려다 보며 금방 눈물을 터뜨릴 것도 같은 얼굴? 하하...그것도 안된다고 할 건 없지. 어느 것이든, 그게 내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친구도, 사진 그대로 그린다고 시작해 놓고, 반쯤 감긴 흐린 눈을 크게 뜨게 해주고, 열리고 있는 입은 닫아 주었다고 한다. 임술도 발갛게 칠해 놓았다. 너도 혼몽 중이구나...하하...
8. 전생이라는 것
전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해롭지 않다. 전생이 그악스러웠다면, 후생은 그것을 순화할 희망으로 살 수 있고, 전생이 영화로웠다면, 고단한 현생의 위로를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런 전후생의 경계에서만 나비의 꿈을 깰까? 언제든, 그 귀신이 그 귀신이지만, 생사경계를 넘어서, 우리는 나비의 꿈을 깨고 또 깬다. 나는 이제, 한 마리 춤추는 나비는 못되어도, 한 뭉텅이 가벼운 솜털같은 존재가 되어 간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나 내 소리는 그 안에서 두웅~~~북이나 징치는 소리처럼 들려 온다. 그 소리는 더 커지기도 하고, 작아져 잘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 때로는 샤프나 프렛 몇 개쯤 어디엔가, 임시조표가 붙기도 한다.
9. 인연이라는 것
그를 인사동에서 만난 적이 있다. 어느 찻집에서 내려다 보이는 맞은편에서 그는 인사동을 드나들다 사라져 가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목탁을 치며 도를 닦는 중이었다. 그 때 함께 이야기 나누던 두 불친 중 한 사람은 생의 마지막임을 알았던 듯, 한국과 중국을 길게 여행한 뒤끝에 가장 가까웠던 두 불친을 만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전날이었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얼굴도 못본 그 부인이 전화를 해왔다. 나는 그 몇 년 전, 시카고에 갔다가 아들과 함께 그 집에서 하루 묵은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부인은 한국에 와 있어서 못만났었다. 나와 같은 고향의 여고를 나왔다던, 나를 한 번 만나고 싶다던 그 부인은 이제 언제 만날 일이 있을까? 함께 앉아 있었던 다른 한 불친은 그 후, 영원할 줄 알았던 블로그 교분을 어떤 마음 아픈 일로 오래 끊고 있다. 난 아직 그녀를 못끊고 있는데....
어떤 인연도 그저 잠시, 옷깃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부정하고 싶다. 인연은 눈에 보이는 그 순간에만 있고 없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 스님은 지금도 저 하늘, 아니면 이 땅 어디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위해 도를 닦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그리고, 그 돌아간 불친도, 어느 하늘 아래, 어쩌면 또 어떤 영혼으로 이어져 가고 있을지 모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이런 화두는 나에게 그치지 않는다.
며칠새 가을이 완연해진 듯, 풀벌레 소리가 스산하다. 내일은 스틱 하나 잡고 천천히, 뒷산을 오르리라. 좀더 둥글고 좋은 소리가 내 안을 울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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