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스크랩] 望과 忘 (4) ....혁명과 반동, 그리고 맨붕

해선녀 2013. 2. 21. 16:45

 

 

 

둘째, 종교문제를 떠나 현실로 들어와 본다면, 望은 성취해 본 경험이 많을수록 더 큰 望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진 게 많아 세속적인 일에 별로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투표같은 소소한(?) 일에 참여하는 열정은 놀랍죠. 지난해 총선에서 타워팰리스 투표율이 유독 높았던 것이 한 사례가 되겠죠. 어쩌면 그런 적극성은 ...... 그쪽 계층 인간들의 '본능' 혹은 '집단 무의식' 같은 건 아닐까요? 인간 세계에서는 그런 적극성이 생존에 유리함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체화시킨 거 아닐까요?

 

기득권(旣得權)층... "이미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란 뜻이죠. 가져봤기에 그 권리를 지킬 줄도 아는 거 아닐까요? 望을 품어봤고, 또한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느껴봤다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望이 지속되기에 그런 거 아니었을까요? 

 

구태여 기득권층으로 제한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이 기득한 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고 일부 진화생물학자들은 이야기하죠.  사람들은 금력/권력 뿐만 아니라 나이/경험/연륜 등을 총동원하여 늙은이가 젊은이를 지배하는 독특한 체제를 구축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나이가 들면 젊은 종족에게 제반 권리를 양보하고 쓸쓸히 물러나버리는데 반해서 말입니다. 인간세계와 달리 동물세계에선 힘쎄고 젊은 것이 대장이죠. 그래서 도킨스 같은 진화론자는 인간에게는 '이기적 유전자'가 있다고 주장하죠. 도킨스 주장이 맞다면, 아마도 望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진화방식을 터득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죠.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는 '신즉물주의'라는 사조가 유행합니다. 절망적인 현실에 이르게 한 제도나 체제의 주역들을 그림 속 심판대에 올려 놓는 것이 유행이 되죠. 게오르그 그로스 (George Grosz)라는 화가의 작품을 하나 보죠.

 

 

얼핏 봐도, 언론인/성직자... 등등이 보입니다. 표정도 게슴츠레하거나 욕망으로 가득차있죠. 물론 기득권층입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상을 그렸기에, 체념과 냉소가 그림 속에 가득합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화가는 독일 이름인 게오르그를 조지라는 영어 이름으로 바꾸기까지 했을까요? 우리가 "이 나라 꼴보기 싫어 이민 가버리고 싶다"라고 말할 때의 그런 심정이었겠죠.

 

望이 또 다른 望을 키워가는 느낌, 그리고 그 결과를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려했던 느낌이 들지 않나요? 여하튼, 望이 어떤 거름장치 없이 지나게 될 경우, 우리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도 맞게 되겠죠. 최근의 북한 핵실험 역시 주변국 望과 북한의 望이 부딪히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거겠죠.

 

 

셋째, 望을 성취해 본 경험이 없거나 성취할 가능성이 적으면 비틀린 望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왕에 기득권층을 언급한 김에 비기득권층도 언급해 보죠. 묘하게도 비기득권층은 자기 계급 성향과 반대되는 투표를 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죠. 빈곤층이나 여성, 혹은 살면서 험한 꼴을 겪어봤던 사람들은 '강한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세력에 투표하는 성향을 보이죠. 자신을 얕잡아 보고 이용해먹을 것이 뻔한 세력인데도 말입니다. 뭐, 우리나라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항상 그래왔다죠. 앞으로도 그럴 거같구요. 

 

사회학자들은 이렇게 분석하더만요. 희망이 없을수록 국가/민족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많다고요. 예컨데, 자국의 어떤 기업체 상품이 해외에서 잘 팔리면 내가 잘 사는 것으로 느껴지고, 국가대표 축구팀이 강대국 대표팀을 누르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뭐 그런 것의 일종이겠죠. 

 

비근한 사례로, 최근 한국에서 유행했다는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을 언급할 수도 있겠네요.

 

 

흔히 프랑스의 역사는 '혁명과 반동'의 역사였다고 합니다. 그 혁명 중의 하나가 바로 <레 미제라블>이라는 영화 속에서 묘사되죠. 영화의 배경은 1832년의 '6월 혁명'입니다. '실패한 혁명'이라고도 칭해지죠. 그 이전에 이미 그 유명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고, 1830년에는 7월 혁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공한 혁명들' 이후에 민초들은 다시 반동을 선택하죠. 대혁명 이후에는 나폴레옹을, 7월 혁명 이후에는 공화정을 버리고 왕정을 복귀시킨 것도 바로 프랑스 민초들이었죠. 그리고 항상 '맨붕'을 겪고 또 혁명하고 또 맨붕을 겪고.....를 반복합니다. 근대의 사건으로는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1968년의 68혁명이 있습니다만, 이 또한 보수세력인 드골 정권에서 그 혁명의 결실물을 반납하고 맙니다. 고쳐 말하자면, 프랑스 역사는 '혁명과 반동과 맨붕'이 점철된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런 국내외 사례들은, 望과 忘이 겹치는 과정을 스스로 자처하는 인간들 사회의 본질인 것 같다고 추정하면.... 무리스러운 걸까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우리사회에서 진보를 지향하는 분들의 望은 합리적일까요? 글쎄요,라고 토를 달고 싶네요.

 

보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구꼴통 신문들마저 가끔 지적하는 진보계층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진보계층은 성급하다"는 거죠. 정치적인 면으로 성급하다는 것은 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최근의 사례로는, 박근혜후보를 이기기 위한, 민주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단일화라는 목적을 위해, 결과론적으로는 안철수후보를 쫒아낸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민주당의 행태는 언급할 필요가 없죠.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그래야 했을 겁니다. 당의 존립과 관계된 거니까요. 하지만, 상당한 호평을 받던 진보 인사들마저도 단일화를 촉구하는, 즉 안철수 퇴진을 요구하는 그 시위 현장에 있었습니다. 

 

근데, 그랬어야만 했을까요?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면, 차라리, 박근혜에게 더 경쟁력이 있는 걸로 추정되던 안철수로 단일화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그래서 차라리, 문재인 선거사무실로 몰려가서 시위해야 했던 것 아닐까요?  왜 그리 성급히 단일화를 추진했던 걸까요? 민주적 지도자를 뽑는 방식이 왜 비민주적이었어야 했을까요?

 

얼마 전, 진보 교수 등으로 구성된 연구단체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랬네요. 박근혜에게 몰표를 던진 노인층에 대한 혜택을 줄이자는 운동이 한창일 때였는데요. "버스를 탔더니 그날따라 노인들만 보이더라. 소름이 끼치더라"라는 댓글들이 달려 있어서요. 철학/사회과학 등의 인문학 서적도 몇권씩이나 출간한... 그런 교수들의 댓글들이 바로 그랬어요.

 

이런 식의, 민주주의를 원하는 과정에서 가끔 드러나는 비민주주의적 방식 ..... 세계 혁명사에 비일비재했습니다. 논리는 다양하지만 결국 비슷하게 집약되죠. "결국 체제가 바뀌어야 민주주의를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당장은 좀 뭣하지만, 후일을 위해 ...."     근데, 과연..... 그럴까요?

 

진보세력을 성급하게 만드는 건 뭘까요? 혹시 望을 성취해보지 못했기에, 예컨데, 민주주의를 꿈꿨지만 민주주의를 가져보지 못했기에 그리 성급한 건 아닐까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죠. 많은 이가 피를 흘려 주신 덕분에, 박정희 시대에 비하면 우리사회도 많이 민주화가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아직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느긋한' 기득권층과 '성급한' 비기득권층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걸까요? 어찌보면 오히려 기득권층이 별다른 욕심이 없어보일 정도로요.

 

 

너무 수다를 떨었군요. 주제로 되돌아오기 위해 이야기를 좀 바꾸죠.

 

몇달 전 영화를 보러 갔어요. <프로메테우스>라는 영화였습니다. 공상과학 영화인데,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야기를 그린 거죠. 생각해볼만한 다양한 소재거리가 있습니다. 영화는 "자기 살해를 통한 생명의 탄생"으로 시작해서 "아버지의 살해"로 끝나죠. 그 중간중간에 많은 이야기거리가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

 

 

 

제 영어실력이 짧아서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음을 미리 밝히고요. 인간의 창조주 (신, 영화에서는 엔지니어라는 외계인)를 찾아 떠나는 우주 여행 중에 인간과 인조 인간이 가볍게, 아주 가볍게 대화를 나눕니다. 인간이 인조인간을 만들었으니 이 또한 결국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화라고도 볼 수 있겠죠.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갑니다.

 

인간 : 창조주는 도대체 왜 인간을 만들었을까?

 

인조인간 : 인간은 왜 날 만들었죠?

 

인간 : (심드렁하게) 그야 뭐...너를 만들 능력이 있었으니까.

 

인조인간 : (역시 심드렁하게)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그냥, 인간을 만들 능력이 있었으니까...

 

저는 이 오락용 공상과학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해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 허걱...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겨 "그냥" 만들었다니?..... 만약 사실이라면, 수천년 동안 인간이 고민했던 철학적 고민들은 그야말로....

 

지젝이란 철학자는 "신에게 부여된 초월적 보호자로서의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신은 우리 행위의 모든 행복한 결과를 보증해주는, 즉 '역사적 목적론'을 강조하는 초월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거죠.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을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한 지젝의 관점이, 저 영화에도 등장하는 거죠.

 

역사적 목적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면,

 

유신론적 입장에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신으로부터 보호받을 양이거나 혹은 속죄받을 염소로 단순하게 구분될 수도 있는 거고요. 무신론적 입장에서는, 제가 지금 주저리주저리 길게 쓰고 있는 이 황당한 "망과 망"이란 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거겠죠.

 

어차피 목적없이 탄생한 존재라는, 하이데거가 말했던 '던져진 존재'라는 표현을 좀 거칠게 바꿔서 인간은 이 세상에 '그냥 내팽겨쳐 진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들어간다면, '사유할 줄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지독한 형벌일 수도 있겠죠. 그런 형벌을 받는 와중에, 望이 이루어 지지 않아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하겠죠.

 

'주체의 소외'라는 표현을 먼저 떠올릴 수 있겠네요.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에서 그 방식을 볼 수 있겠죠.

 

 

 

 

노르웨이어로 된 원제는 모르겠고, 영어로 번역된 제목은 The Scream입니다. 비명을 지른다는 건데..., 저 그림을 패더디하여 만든 동명의 공포영화 <스크림> 시리즈에서도 비명소리가 화면에 차고 넘치죠.

 

근데......... 저 그림 속에는 아무도 그 비명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데, 딴사람들은 그 비명을 듣지못하다니요? 그럼 그림 속 저 사람을 자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너무나 절박해서 그 비명이 차마 발성되어 나오지 못하는 걸까요? 언어로 표출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비명..... 주체의 소외(Alienation)일 수 있겠죠.

 

또 다른 방식으로는 '루이스 캐롤의 역설'이라는 걸 볼 수 있겠네요. 어린 소녀가 말하죠.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네. 만약 좋아했다면 그걸 먹어야만 하잖아.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저 '루이스 캐롤의 역설'을 통해 주체의 분열을 이야기 합니다. 주체의 소외와는 또 다른 단계의 반응이겠죠. 望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려는 시도겠죠.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소위 말하는 '바보'들은 암에 걸리지 않는답니다. 암이라는 병의 주요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말이겠죠. 어쩌면 이런 치명적인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인간이 望과 忘을 교묘히/무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음 글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출처 : 촌촌
글쓴이 : 촌촌 원글보기
메모 : 제목부터 달라지고...본주제 이해에 더 집중하도록 수정보완해 주셨군요. 이 수정본을 따로 스크랩 합니다. 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