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감동받았다 하더라도, 영화 한 편을 보고나서 혹은 책 한 권을 읽고나서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영화나 책의 어떤 부분만을 혹은 어떤 이미지만을 기억할 따름이죠.
그렇게 기억의 한계가 있는 것은 우리 두뇌 용량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일까요? 혹시, 일부만 기억하도록 뇌가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 너무 생뚱맞은 건가요?
근데, 실재로 러시아에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한 번 본 것은 수십년 전의 일이라도 결코 잊지 않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었답니다. 그 사람은 행복했을까요? 별로 그렇지 못했던 것 같더만요. 이 사람을 수십년동안 관찰했던 정신과 의사는 묘한 현상을 발견했답니다. 그 기억력 좋은 사람의 '개념'이 희박한 것이죠. 보통 사람은 쉽게 묘사할 수 있는 '개'나 '고양이' 같은 것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예컨데 개의 너무 많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오히려 개를 '개념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거죠. 이렇게 아주 간단한 것에서부터 어그러지니 "인간으로서의" 정상적 생활이 어려웟던 거겠죠.
철학 용어인 '개념'을 영어로는 concept으로 표현합니다. concept라는 단어에서 ~cept는 "~을 쥐다" "~을 잡다"라는 어원을 가진다고 하더만요. 결국 '개념'이란 것은 어떤 것을 "잡는" 것인데, 저 기억력 좋은 사람은 잡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잡지 못하는 불운을 겪은 거겠죠.
무언가를 "선택적으로 쥐어야" 정상적인 인간으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런 전제를 깐다면, 사물과 사실의 일부만 기억하는 것은 뇌 용량의 문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진화론을 차용하자면 '자연 선택'의 일종이 아니었을까요?
E. H. Carr 라는 역사학자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만, 대화는 개뿔..... 항상 역사는 똑같은 에러를 범하며 반복되죠. 대부분의 민족과 국가가 형성되는데는 거의 예외없이 엄청난 폭력과 피비린내나는 학살이 존재했었죠. 근데 그 기억이 계속 남아 있으면 그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엄청난 장애물로 남게 됩니다. 그러니 구성원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집단적 망각'에 빠져들게 되죠. 민족적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확립할 '집단적 기억'이 존재함과 동시에 '집단적 망각'도 필요한 거겠죠. 망각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가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도요. 기득권자가 "망각을 통한 화해"를 강조하면, 가해자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그 화해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죠. 멍청해서가 아니라.......생존하기 위해서요.
예컨데, 우리가 현재 받아들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처음부터 썩어있었죠. 마르크스가 진단했던 초기 단계는 물론 지금도, 자본주의는 '불균형' 이라는 치명적인 불협화음에 의해 낙인찍혀 있죠.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달해 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 내적인 모순이 바로 자본주의를 영속(?)시키려는 추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추동력의 주요한 한 축이 혹시 망각인 것은 아닐까요?
작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 서점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샀어요. 허거덕.... 가벼운 읽을 거리로 뒤적거리다 여러번 충격을 받는 일이 발생했죠. 소설속 주인공은 역사를/기억을 소멸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기억을 소멸시킨다는 것은, 결국 가상의 새로운 기억을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작업이 됩니다. 소설 속에서 쓰여진 용어를 까먹었는데, 어쨌든 한 사람이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갖게 되는 현상이 묘사됩니다. 전혀 융합될 수 없는 두가지 이데올로기가 한 인간 내부에서 공존하는 거죠. 불가능할 것같은 그런 현상을 가능토록 하는 것은, 조지 오웰에 의하면 바로 '증오'와 '망각'이죠.
'증오'와 '망각'이란 용어가 등장한 김에, 이야기를 잠시 곁가지로 돌려 봅니다.
성경에는 몇몇 동물이 등장합니다만, 뱀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양과 염소가 가장 많이 등장할 겁니다. 버트런트 러셀은 양과 염소에 대한 차별을 근거로 기독교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러셀의 책 한 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림이 일어날 때 양과 염소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저주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러셀은 성경 내용 일부의 잔인함을 드러내기 위해 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만, 하필이면 '염소'에게 저주를 퍼붓는 점이 특이하죠. 기독교가 고대 유목민인 유대인의 생활과 밀접하다 보니 양과 염소는 성경 여기저기서 등장합니다.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효용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염소는 더 천대(?)받죠. 염소는 주로 종교적 제의의 제물로 등장하는데, 카라바조 그림에서도 역시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되는, "속죄"받는 도구로 차용되는 걸 볼 수 있죠.
(우리가 흔히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로 Scape Goat입니다. 구태여 따지자면 '속죄 염소'가 바른 번역이겠죠. 알려지기론, 중국에서 goat를 산양으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로 옮기며 '양'으로 오역했다고도 하고, 혹은 goat도 넓은 의미로는 양에 속하므로 '희생양'이 올바른 번역이라는 주장도 있더만요.)
<이삭의 희생>이라는 카라바조 그림의 제목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염소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삭을 위한 속죄염소>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이삭과 염소가 나온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염소의 슬픈 눈매가 여실히 드러나죠. 뭔갈 생각하는 눈빛 아닌가요?
희생양, 즉 속죄염소는 어쩌면 인간의 망각을 위한 필수요소일 수도 있지요. "속죄" 염소를 통해 자기 방어기제를 마련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 속죄 염소가 인간의 망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아마도 저 염소의 눈빛은 망각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이 표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애써 연결시켜 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황당한 이유는 이어지는 글에서 밝히도록 하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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